
작업노트
단풍잎이 물들던 시기, 화재현장 기사에서 본 보도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강렬하게 잡아끌었다. 사진은 화재가 난 고시원 건물 외부를 찍은 것으로, 유리창이 다 떨어져 나간 창틀은 화염에 녹아 일그러지고 검게 그을린 내부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어떤 공간이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철골 구조물만이 간신히 어두운 내부 공간을 지탱했다.
나는 그 참혹한 현장 사진에서 타버린 건물 주변에 함께 찍힌 노란 은행잎이 눈에 들어왔다. 은행잎의 노란 빛깔은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계없이 계절의 순환고리에 맞춰 만발했다. 나는 검게 그을린 창문 내부와 노란 은행잎의 색채 대비에서 삶에 드리워진 죽음의 명암을 떠올렸다. 삶은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라졌다. 잎이 피고 지듯, ‘사라짐’은 지나가고 ‘살아 있음’을 알리는 꽃이 핀다. 나는 보도사진과 당시 내가 본 단풍잎을 혼재해 사라져가는 순간을 기록하려 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지만, 그 순간을 그림에 담고 싶었다.
연필을 주 재료로 사용한 이전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은 색채 대비를 나타내기 위해 장지에 유화를 사용해 그렸다. 장지는 캔버스와 비교했을 때, 붓을 사용하기에 거칠고 물감이 빨리 흡수되지만, 그만큼 색이 잘 스며들어 은근하게 퍼지는 느낌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나는 사진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나의 감정을 담아 색을 변형했는데, 일그러진 창틀과 내부의 어둠은 블루 계열 색상 중에서도 검푸른 색인 ‘인디고(Indigo)’를 사용했다. 장지에 스며든 인디고의 색감은 삶의 온기가 사라진 공간의 서늘함을 나타낸다. 그 위를 붉은색 단풍잎이 감싸 색채의 대비를 주었다. 창문 내부의 공간은 시간이 멈추었음을, 그 위를 떨어져 내리는 단풍잎의 시간은 흐름을 의도했다.
“청색은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
-파블로 피카소-
작품에서 예술가가 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색채에 담겨 있다면, 청색시대(1901~1904)의 젊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인간의 슬픔과 밤의 고독을 나타내기 위해 청색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색중의 색은 청색이라 말했을 정도로 청색에 매료되어 있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모델로 검푸른 색과 청록색 계열로만 채색해 어두운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청색시대의 피카소가 다양한 색채와 불필요한 형상을 배제하고, 청색으로만 현실의 본질을 담으려 한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다. 나에게 있어 청색은 고요함을 표현하기 위한 색채이다. 고요함은 텅 빈 공간을 상상하게 하고, 쓸쓸한 감정을 내포한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눈에 청색 필터를 끼워 넣은 것처럼 고요한 순간을 포착한다. 청색은 차갑고, 우울한 감정을 들게 한다. 청색으로 칠해진 공간은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이 오묘하고, 검푸른 색은 덧칠할수록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강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서도 쓸쓸하고 덧없이 사라진 순간에 대한 나의 감정이 검푸른 인디고로, 반면에 살아감을 알리는 극명한 대비는 붉고 노란색으로 채색되었다.
단풍잎이 감싼 창문 내부의 방은 시간이 멈춰버렸다. 가을의 서늘한 밤, 누군가에게는 자신만의 보금자리였을 공간이 한순간에 불타버렸고 건물에 머물던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왜 하필 그곳이어야 했는지, 사람들은 이제 그곳에 없다. 영원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 불안, 야속한 감정들이 뭉쳐 빈 공간을 맴돈다.
나는 예기치 않게 사라져가는 삶과 그 삶을 품었던 공간을 기억하기 위해 그렸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려는 시도이다.
*2019 모두의 미술사, 비평 선집 Vol.1 <파문, 수면에 이는 물결> 23~25p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