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작업의 조각들

2018년 7~12월 작업의 조각들.

0715(일)

망원동 주택단지에서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빌라를 보았다. ‘행복’을 이름으로 내건 집이라니.. ‘집’과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나에게는 마냥 긍정적 의미로만 다가오지 않았기에 계속 눈길이 갔다. 바로앞 전봇대에는 분양광고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분양광고 전단지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한강 조망 신축 빌라, 상수역 5분 거리, 최적의 조건들 등을 내건다. 대부분 역세권, 신축빌라, 한강이 보이거나 풀옵션, 고급, 실입주금이 1억이 넘는다. 나는 분양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엄두도 낼 수 없는 액수이기에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만, 지금은 드로잉 종이가 되었다. 행복이 되는 조건들과 그로인해 오히려 불행함을 느끼게 되는 현 시대에서 서로 상충되는 이미지를 하나로 합쳐 그려보기로 했다. 전단지를 모으고 복사해 그 위에 색연필로 쌓아 올리며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 위에 무엇을 그려 넣을지 계속 고민해 본다.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을 찾아나설 시간이 없기에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진 않지만, 일상적인 풍경을 이 위에 담아내고 싶다.

0802(목)

머리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려보기로 했다. 연필 선들을 쌓아서 덩어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내가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다. 타원 안에는 하늘을 그렸고, 그 주변에는 마치 무언가 자라서 흘러내리는 듯한 형상을 그렸다. 요새 하늘을 자주 보고, 맑은 하늘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예전엔 하늘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는 것 따위가 그리도 유치해 보였는데.. 요새는 그냥 하늘을 쳐다보면 이런저런 잡생각도 들지 않고 구름들이 움직이는 걸 가만히 쳐다본다. 특히 맑은날 사무실에 앉아만 있을 때는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 없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걸지도 모른다. 원래 항상 볼 수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법이니까. 하늘은 맑고, 도시는 바쁘게 돌아간다. 무언가.. 대비되는 이미지를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에 잠식 당하고 있는 하늘 같기도 하다.

0807(화)

해가 질 때쯤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을 보았다. 전쟁같은 퇴근시간, 버스를 타고 인덕원역에 내리니 저녁 7시 30분쯤이 되었다. 여름이다보니 해가 길어서인지 아직 구름에 빛이 비쳤다. 작업실 가기 전, 저녁을 먹으러 김밥집에 가는 길이었다. 쌩쌩 달리는 도로를 넘어 저 멀리 하늘은 채도가 낮은 회색 빛깔이 섞인 파란 하늘이었고, 구름은 뭉개뭉개 서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며, 위쪽은 분홍빛깔을 띄고 있었다. 마치 구름산이 잠시 생긴 듯한 형태였다. 잠시 서서 바라보고 그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사이좋게 서로 포개진 구름은 꽃이 피어나는 것 마냥 보이기도 하고, 막상 그리고 보니 얼굴과 얼굴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유화와 오일크래용을 사용해 보았다. 크래용으로 대략적인 구름의 형태를 잡고, 구름과 배경은 물감으로 내가 가진 여러 종류의 파란색과 회색, 보라색, 베이지색을 조합해 느낌에 따라 칠했다. 붓은 넙적 붓으로 중간 사이즈부터 작은 것 까지 네 가지 정도 사용했다. 어느정도 구름과 배경의 느낌이 맞아 떨어졌을 때 크래용으로 나뭇잎 질감을 내주며 그렸다. 그리고 도시를 상징하는 가로등과 전봇대를 그렸다. 구름을 덮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전선들은 그리지 않았다. 

0913(목)

쇼핑몰 세일 기간임에도 나는 아무것도 살 수가 없었다. 커다랗고 빨간 SALE 현수막이 눈에 아른거린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물건들이 반짝이는 쇼핑몰에서도 나는 하품만 나온다. 

0926(수)

가끔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세상과 분리되어 단절된 느낌을 받을 때, 작업실 내 자리에 앉아서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본다. 내가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동안 유일하게 세상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그려야지!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지! 의미를 담아야지!’의 압박에서 벗어나, 내가 작업실에 머물면서 가장 생각을 많이하고, 반대로 생각을 비우게 될 때 보게 되는 곳인 바깥 풍경을 사진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관찰을 하면서 그려보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짧은 시간에도 하늘은 정말 빠르게 변화했다. 구름이 흘러가고 시간도 흘러갔다. 시간대 별로 다른 바깥 풍경을 그려야 겠다.

1106(수)

블루 계열 색감에 계속 빠져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쓰고 있다. 왜 일까? 익숙해서 일까? 지금 그레이와 블루를 배경에 그라데이션 해 칠했는데.. 뭔가 더 자연스럽게 섞였으면 좋겠다. 말리고 덧칠해야지, 그 위에 무엇을 그릴지 고민중이다. 자꾸 생선이 떠오른다. 생선, 횟집, 수족관 속 살아있지만, 죽은 듯한 눈으로 숨만 붙어 있는 생선의 표정. 계속 생각난다. 드로잉을 더 해보자. 

1112(월)

단풍이 물들어 가는 색감, 엊그제 본 고시원에 불이나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 길을 가다 보게 된 횟집 수족관 속 장어의 멍한 눈. 누군가는 열심히 삶을 살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단풍은 까맣게 타버린 건물 옆에서 노오랗게 익어간다. 나는 뭔가를 기록하고 싶다. 잊혀지는 것들.. 다시 돌아오는 계절, 계속 살아내고 있는 오늘을.

1116(금)

화면가득 단풍잎으로 채워버릴까? 가운데는 터널처럼 깊은 홀을 만들고. 단풍은 왜 그렸나? 울긋불긋한 색감의 끌림과 인터넷 기사에서 보게 된 불타버린 고시원, 거뭇해진 창문과 방안. 그리고 대비되는 단풍나무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가을은 흐드러지게 아름다운데.. 씁쓸한 사건들이 연이어서 벌어진다. 색감의 대비, 삶과 죽음의 대비, 그 찰나의 순간들을 그릴 수 있을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피고 지는 단풍을 그리고 싶어졌다. 

1206(목)

더 일찍오자. 아직 그림에 대해서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싶은 형상을 먼저 그려보자. 그리고 깊게 생각해 봐야지.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해. 나아가기 힘들다. 그때 내가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다. 느낌, 강한 끌림을 믿고 진행하자.

1207(금)

단풍잎 뒤 창문을 그리고 있다. 창 안은 서늘한 파란 어둠으로 가득하다. 타버린 내부 사진을 보고 그리고 있다. 똑같이 그리진 안을 거다. 타버린 창문 내부는 브라운 보단 블루 계열 분위기가 감정을 표현하기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장지에 스며든 인디고의 색감이 서늘하다. 내부에 깊이 공간감을 주어야지. 단풍잎이 감싼 창문 내부의 방은 시간이 멈춰버렸다. 영원할 수 없는 것들, 우연한 사고. 왜 하필 그곳이어야 했는지. 저마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 그곳에 없다. 두려움, 불안, 야속함. 공간에 알 수 없는 기운들이 감돈다. 

1220(목)

정적 속 불안 (개인전 제목으로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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